[데샹테이] 雪泥鴻爪(설니홍조) 下
2019. 4. 16. 21:12태의는 며칠간 회의 시간인 정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가 끝난 뒤에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뜨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오전과 저녁 시간에도 식사 등의 꼭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태의를 이상하게 보는 이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방 밖으로 나와 다른 능력자들과 사교 관계를 맺으라고 직접적으로 권유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임의 마지막 날, 태의는 여느 때처럼 열한 시 반 즈음 회의실에 도착했다. 열한 시 반. 회의 시간이 다 되어가기까지 회의실에는 태의 혼자만이 앉아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테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까미유였다.
“이럴 것 같아서 와봤는데, 역시나였군.”
그는 흰 가운의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주저 없이 태의에게로 다가갔다.
“어제 회의가 끝나고 각국으로 돌아간 능력자들이 많아서, 회의는 취소되었어. 이야기를 꼭 나눠야만 했던 주제는 전부 다루었으니 먼저 돌아간 것이겠지.”
“……몰랐소. 고맙군.”
태의는 애써 어색함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까지 걸어가는 길을 까미유와 함께해야한다는 사실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뭘. 매일같이 어디로 그렇게 사라졌던 건지 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 회의가 취소된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와보길 잘 했군.”
정작 까미유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태의는 며칠 동안 까미유를 피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태의의 안대를 풀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태의는 그런 그가 마냥 편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걷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서먹하고도 무거운 공기가 꽉 막힌 듯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태의는 까미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테이.”
방까지 가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까미유가 태의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의심이 참 많아. 그렇지?”
태의는 까미유가 자신에게 한 질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냥 해본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잖나.”
태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 필요는 없었다.
“며칠 째 날 피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알고 있었소?”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군.”
까미유의 노골적인 말에 태의는 말문이 막혔다.
“당신을 의심한다기보다는……”
“알고 있어. ‘그 사건’ 때문이겠지. 내가 한때 마피아에 몸담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런 것 아닌가.”
표면적으로 그른 말은 없었기 때문에 태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까미유의 앞에서 히카르도 바레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전혀 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체 왜 당신이 그 일에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 과거는 과거일 뿐 아닌가.”
“단순히 당신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일에 대해 묻는다 해도, 당신은 대답해주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태의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덩달아 집요하게 파고들 줄 알았던 까미유의 태도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부정할 수는 없겠군. 나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을 테니.”
까미유는 애써 사실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꽤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태의 앞에서도, 그는 그저 초연할 뿐이었다. 태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불안하고도 거슬렸다. 매우.
“나는 그래도, 우리가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그의 말은 씁쓸하다는 투였다. 어째서? 태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까미유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에게까지 친절과 배려를 베풀 만큼 우호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태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대가 나에게 호감을 보일만 한 일이라도 있었던가?”
“의사의 날카로운 감이랄까.”
어쩐지 그대와 나는…… 잘 맞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 이것 또한 내 착각이었나 보군. 꽤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까미유가 답했다.
“그러는 자네는 그동안 내게 단 한 번도 호감을 가진 적이 없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그대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오, 데샹.”
태의는 다른 대답을 꺼냈다. 까미유의 질문과는 퍽 동떨어진 대답을.
그는 까미유가 믿을 이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태 까미유을 의심하는 이가 비단 태의 뿐은 아니었다. 어찌 그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그의 선의를 의심하는 사람도, 뒤로 검은 속내가 있으리라 짐작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까미유는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했고 타올랐던 의심이 사그라지는 것은 빠르고도 쉬웠다.
다만 태의의 의심은 쉽게 꺼지는 불씨가 아니었다. 그는 까미유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했고, 그 끝을 끈질기게 좇았다.
그리해서 내린 결론이, 까미유 데샹은 믿을 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에서 선입견과 직감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했는지는 알기 어려웠으나 태의가 지켜본 까미유는 분명 그랬다. 번드르르한 말 뒤에는 숨겨진 저의가 있었고 선의의 행동 뒤에는 찜찜한 수작이 존재했다.
‘언젠가, 이 가리개를 벗고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태의는 어릴 적 제 어미가 몇 번이고 일렀던 말을 곱씹었다. 유영은 태의의 가리개를 치워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빌었더랬다.
그러나 태의는 안대를 풀지 않았다. 설령 그런 사람을 만났어도 말이다. 태의가 이태껏 만난 많은 이들은 겉과 속이 달랐고,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그가 안대를 풀지 않은 이유.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를 검은 안대 속에 파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끌리는 것 또한 사실이지.”
기나긴 정적 끝에 태의가 대답했다. 혀끝에 맴돌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은 뒤에야 내뱉은 말이었다. 이 한 마디 말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나서야 내뱉은, 그러나 차마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나. 어차피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태의는 자신의 할 일에 충실한 이였다. 그는 해왔던 일이 있었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태의는 자신의 과거, 그리고 자신이 이루었던 것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 보지.”
까미유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태의를 앞질러 걸어갔다. 태의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기고 간 뒤를 굳이 좇지 않았다. 그가 또 보자는 말을 남겼다는 것은, 이것이 절대 끝이 아니라는 의미였으니까.
며칠간의 모임 동안 태의는 각국의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착실히 정리해둔 종이 뭉치와 함께 귀국할 준비를 하던 차였다. 짐을 옮기기 위해 서류더미를 한 아름 안아들었을 때 두툼한 더미 사이에서 붉은색 봉투가 하나 떨어졌다.
서류를 잠시 내려놓은 태의는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달랑 종이 한 장이 두 번 접힌 채 들어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연히 태의의 눈에 들어온 종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까미유 데샹은 논문 작성 후에도 유전자 변이에 관심을 보임. 카모라 마피아 소속 당시 금전적 지원을 받아 유전자 변이 실험을 했었음. 본 조사 결과에서 지칭하는 유전자 변이 실험은 다음과 같다.: ‘능력자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비능력자에게 능력을 부여하거나, 비능력자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능력자에게서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실행하는 실험’
당시 동물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서 90% 이상의 높은 안정성을 확보했으나, 일부 실험 대상이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변한 사실을 폐기했다는 이야기가 있음. 이후 정부의 실험금지령이 떨어졌고, 까미유 데샹이 해당 실험 관련 자료를 전부 폐기처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가 유전자 변이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됨. 」
태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종이를 끝까지 읽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나, 지금의 태의에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는 종이가 접힌 자국 그대로 종이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책상 위에 곱게 올랐고, 대신 잠시 내려졌던 서류 더미들이 들려졌다. 그가 방을 나섬과 동시에 책상 위에 놓인 붉은색 봉투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보인 그의 검은 머리칼 뒤로, 옅은 재가 휘날렸다. 그리고 자취조차 사라졌다.
雪泥鴻爪(설니홍조): 눈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 자취만 남고 실체는 없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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