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테이] 雪泥鴻爪(설니홍조) 上

2019. 3. 30. 23:04

하태의는 검은 천자락을 꾹 눌러 쥐었다.

이제 그에게 안대는 필요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알게 되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겁에 질려 울던 어린아이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가 안대를 벗어두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가여운 제 누이의 유품이라는 의미에서였고, 또한 굳이 풀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태의의 어미는 그에게 가리개를 단단히 묶는 법을 알려주며 일렀더랬다.

‘이 가리개를 벗고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음험하지 않은 사람, 흉계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 원한을 등에 업지 않은 사람, 입으로 뱉는 말과 글로 적는 말이 다르지 않은 사람, 업신여김을 비수처럼 품지 않은 사람…….

물론 그런 사람이 쉬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으며 비록 있다 할지라도 체탐인의 신분으로 외국을 자주 오가는 태의가 그들과 오랜 연을 이어나기에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태의는 제 어미가 했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둔 채 살았다.

 

“까미유 데샹이라고 합니다.”

하태의에게 있어 까미유 데샹의 첫인상은 깔끔했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순백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태의는 그를 익히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그의 이름은 꽤 자주 오르내렸다. 머나먼 타국에 사는 의사임에도 조선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질 정도이니, 외국과 조선을 왕복하며 조사를 벌이는 태의가 명성 높은 의사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까미유와 태의가 만난 목적은 ‘정보 공유’였다. 물론 단둘이 비밀스럽게 마련한 자리는 아니었다. 정식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열댓 명의 능력자들이 회의실로 마련된 식당의 자리를 차지했고, 며칠 간 각국의 능력자들에 대한 입지 혹은 사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로 예정된 모임이었다. 태의는 능력자들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참석한 자리였고, 때문에 모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올해 일본에서는 능력자 혐오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그러나 태의가 집중한 것은 다른 능력자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일본에서 온 능력자에게 머물렀으나 온 신경은 까미유를 향해있었다. 어느 샌가 그가 까미유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그의 시선이 태의에게 닿았을 때였다.

“……이?”

“……테이 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태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명 남짓한 능력자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몰려 있었다. 그제야 태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비록 우호적인 성격을 지닌 모임이라고는 하나, 태의는 그들 앞에서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새삼 안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조선의 경우, 특별한 사건사고는 없었소. 지켜보아야 할 것은 지속적으로 개편되고 있는 능력자들을 위한 정책들이오. 아직은 서양의 정책들에 비하면 미비한 대책이지만, 예전에 비해 실정은 나아졌다 할 수 있겠습니다. 상류층의 비능력자들 사이에서는 반대하는 의견도 간간히 나오고는 있으나, 문호 개방 또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경과를 지켜볼 만하다 생각되오.”

그간 조선은 많은 변화를 거쳤다. 도성 내에서 능력자를 차별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다른 지역도 서서히 바뀌는 중이었다. 조선의 왕은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으로. 보수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일부 세력권의 반발에도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태의는 조선이 변화하는 과정을 돕는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일찍 등져버린 제 누이에게 바뀐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다음은…… 까미유 데샹.”

하태의가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의 까미유 데샹이 몸을 일으켰다. 흰색 의사 가운이 하태의의 검은 도포자락을 스쳤다.

“이탈리아는 아직 시뇨리아 광장 집회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열렸던 대규모 집회보다는 훨씬 인원이 적지만, 아직까지도 능력자 추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많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히카르도 바레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카모라 마피아를 떠난 상태입니다.”

까미유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금까지는 그에게 범행 동기도 없고, 증거 또한 부족하기 때문에 그가 가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만, 대부분의 정황이 히카르도를 가리키고 있는 데다 자신이 인정한 사건이니 달리 의심할 구석이 없다고 보는 바입니다.”

태의는 까미유가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까미유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옅게 심호흡을 했고, 오직 태의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을 가리면 다른 감각들이 훨씬 날카로워지는 덕이었다.

그리고 태의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감각도, 직감도 말이다. 그가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을 리는 없었다.

태의는 까미유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검은 안대에 가려진 채로.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모임을 마무리하도록 하죠. 개별적으로 말씀을 더 나누셔도, 쉬거나 취침을 하셔도 좋습니다.”

태의는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까미유를 지나쳐 가볍게 목례만을 남기고 식당을 나섰다. 곧장 위층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간 태의는 짐을 뒤져 가져온 서류들을 꺼냈다.

「 시뇨리아 광장 집회 사건 보고서 」

유럽 지역의 정보 수집은 태의의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태의는 이 서류를 열어본 적이 없었다. 동료들이 혹시라도 모르는 일이 있으면 어쩌느냐며 떠밀 듯 안겨준 서류가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태의는 짐을 늘리기 싫다는 자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종이를 챙겨준 동생에게 감사하며 보고서의 첫 장을 넘겼다.

「 사건 요약. 시뇨리아 광장 집회에서 능력자 세력과 비능력자 세력이 충돌함. 이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비능력자 학살 사건이 일어남.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히카르도 바레타로, 카모라 마피아 소속임. 」

보고서는 길지 않았다. 용의자가 비교적 금세 정해졌고, 그의 범행 인정도 빨랐기 때문에 증거물 요약 등의 내용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서류 뭉치가 있었다.

“카모라 마피아……”

태의는 종이를 빠르게 넘기며 히카르도의 이름을 찾았다. 맨 앞의 열 장을 뭉텅이로 넘긴 뒤에 그의 손이 멈춘 것은 십오 쪽이었다.

「 히카르도 바레타. 카모라 마피아의 현 카포. 다소 과격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어린 나이에 행동대장 위치에 오름. 조직원들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지만, 까미유 이외에는 돈독한 친구가 없는 것으로 보임. 」

“……잠깐, 뭐라고?”

태의의 시선이 줄곧 같은 단어를 맴돌았다. 히카르도 바레타에 대한 자료에, 까미유? 보고서가 잘못되었을 리는 만무했지만, 태의는 잠시 보고서를 의심했다.

“까미유 데샹, 카모라 마피아, ……히카르도 바레타.”

보고서에 의하면, 셋은 분명 전부 밀접한 관련이 있을 터였다. 태의는 급히 지나쳤던 쪽들을 확인했다. 까미유. 까미유 데샹.

「 까미유 데샹. 카모라 마피아의 일원.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단시간에 밟은 의사로서 마피아면서도 국제의료봉사단체의 회장직을 맡고 있음. 후원금 마련에 주력하고 있으며,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한 의사임. 시뇨리아 광장 집회 사건 당시 히카르도 바레타를 변호하며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주장했으나 모든 정황이 히카르도 바레타를 가리키기에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보임. 어떠한 전설에 근거하여 흡혈귀와 늑대인간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세간의 관심을 이끈 적 있으며 유전자 변이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추정됨. 」

거기까지 읽은 태의는 서류를 덮어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었다. 의문만이 늘었을 뿐, 궁금증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오늘 편히 잠들긴 글렀군.”

가볍게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태의는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미리 호텔의 시설 위치를 안내받은 터라 길을 찾기는 쉬웠다. 호텔을 예약했던 러시아인 능력자가 안내해주었던 길을 떠올리며 걷자 곧 분위기 있는 칵테일 바가 그를 맞이했다.

“허어, 귀신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더니.”

태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가 보면 친한 사이인 줄 알겠소. 초면임에도 그리 손을 흔들 줄이야.”

“그거야 친해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아까 한 번 마주했지 않나.”

까미유가 어깨를 으쓱였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기 때문인지, 격식을 차리지 않은 반말이었지만 태의는 개의치 않았다.

“나름 옆자리에도 앉았었는데, 어렵게 굴긴.”

방금까지 그대에 대한 자료를 읽다 왔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쳤으니 어려울 법도 하지 않겠소. 태의는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아, 블랙 마티니로 부탁하오.”

빠르게 주문을 마친 태의가 까미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겪지 않은 사람을 오직 감과 선입견만으로 판단하기는 아직 일렀다.

“그래서…… 여기서 혼자 무얼 하고 있었소?”

“다른 능력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방금 홀로 남은 차였지. 마침 자네가 눈에 들어와서 부른 것뿐이야.”

“그렇군. 특별한 얘기라도?”

“딱히. 사실 내가 질문을 받는 쪽이었지. 이탈리아가 워낙 시끄러워서 말이야.”

“그럴 만 하군.”

멀끔한 정장을 입은 바텐더가 태의의 앞에 칵테일을 내려놓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까미유가 물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야 차고 넘쳤다. 백 개를 대라면 그 이상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전부 입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태의는 더없이 신중하게 고민했다.

“히카르도 바레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고 싶소.”

히카르도의 이름이 언급되면 까미유가 불쾌해할 것이라는 태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표정에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한 태도였다.

“그는 좋은 친구였지. 이제는 아니지만 말이야. 참 잔인한 사건에 휘말렸어.”

“꽤 친했나 보군.”

“꽤?”

까미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의는 블랙 마티니를 한 모금 들이키며 그를 기다렸다. 단 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음료는 태의의 취향에 적합했다.

“꽤 정도가 아니었지. 그에겐 나뿐이었으니까. 물론 나에게도 그는 능력 있는 동료였고, 나를 이해해주는 최고의 친구였어.”

“이번 일에서도 처음에는 히카르도의 편을 들었다고 하던데.”

“당연하지. 나는 그를 믿었으니까. 결국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까미유는 말끝을 흐리더니 음료를 들이켰다. 겉보기에는 친한 친구의 잘못에 대해 슬퍼하는 이의 모습이었으나, 태의는 안일함에 물들지 않았다.

‘시뇨리아 광장 집회 사건 당시 히카르도 바레타를 변호하며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주장했으나 모든 정황이 히카르도 바레타를 가리키기에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보임.’

까미유는 자신이 히카르도를 감정적으로 변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당시 사건을 히카르도가 아닌 ‘자신의’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짓을 덮어쓸 이유가 있는가. 그것도 모든 정황이 히카르도를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까미유 정도 되는 인물이 아무 의미도 없이 그 따위 무모한 주장을 펼쳤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검은 안대 너머의 까미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러다 칵테일에 취하는 것도 금방이겠군. 슬슬 들어가서 주무시오. 내일도 모임에 참석해야 하지 않소.”

“하긴, 여기 오래 머무르긴 했지. 그럼 먼저 올라가볼 테니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해.”

품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친 까미유가 바를 나가자 태의는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을 의심하는 짓거리는 피곤했다.

 

다음 날, 회의실로 가는 길에 마주친 까미유는 태의에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테이, 좋은 아침이군.”

“태도를 보아하니, 나름 좋은 잠을 이루셨나 보오.”

까미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의의 옆에 서서 걸었다. 둘은 가벼운 수다를 떨면서 회의실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까미유는 모두에게 친절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 보내셨습니까? 기분이 좋아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회의를 준비하려던 태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느껴야만 했다. 사근사근하게 모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까미유는 분명 모두에게 호감을 살 만한 이였다.

까미유는 그 특유의 웃는 얼굴로 모든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나서야 자리로 향했다. 회의실은 지정석 구조였기에 태의는 여전히 까미유의 옆자리였다. 불쾌한 감정은 없었다.

회의에서는 별다른 내용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능력자들을 위한 복지 제도에 대한 이야기와 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대화만 나누었을 뿐.

“테이, 같이 나가지 그래?”

전날과 같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던 태의를 붙든 것은 까미유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바로 방에서 쉴 생각이었소만…….”

“저런, 내가 건너편 방에 머무는 것도 몰랐던 건가?”

전혀 몰랐다. 태의는 오직 모임에서의 정보 공유만을 목적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주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렇다면야, 같이 가도록 하지.”

까미유와 태의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의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에 대해서.

모임에서 나누는 의견과 개인의 의견은 차이가 분명하다. 모임에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보다 사회와 국가의 안녕을 고려하여 신중히 발언해야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적인 의견은 능력자의 권리를 더 생각하므로, 능력자들은 때때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묻어두었던 각자의 의견을 꺼내 수다거리 정도로 삼곤 했다.

태의는 모임에서 나눈 의견과 자신의 의견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능력자들의 권리를 서서히 확대해나가고, 여러 능력자들을 관리직에 등용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 또한 비슷한 정책을 통해 등용되어 조선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서, 정책을 서서히 바꿔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오.”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바꿀 생각인지가 궁금하군.”

태의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까미유가 물었다. 그는 능력자들에 대한 타인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생각이야 우리가 강제로 바꿀 수 없는 것이잖소. 무얼 어쩌겠소, 서서히 바뀌도록 기다려야지. 지금까지 바뀌었던 것처럼 말이오.”

태의는 제 누이를 떠올렸다. 도린은 세상을 편히 뜨지 못했다. 태의는 온종일 자신을 데리고 숨고 도망만 다니던 삶을 살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안락한 삶은 채 누리지도 못하고 떠난 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허나 사람들의 인식이란 누군가가 감히 강제적으로 좌우할 수 없는 노릇이니, 태의는 까미유의 물음에 초연히 답을 하면서도 조바심을 내지 않고 느긋함을 가지려 애썼다. 그럼에도 세상을 당장 변화시킬 수 없다는 아쉬움과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도린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그에게 남아있는 한 말이다.

“기다림이 너무 오래 걸릴 거라는 생각은?”

까미유는 태의의 대답에 영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태의도 자신의 대답이 안일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신이 아니고서야 어쩔 도리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테이, 세상은 빠르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어. 문제는 그저 그 선두가 누가 되느냐가 남아있을 뿐이지.”

“그러나 생각을 강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까미유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둘의 방 사이 복도에 서서 문고리를 쥔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태의를 바라보았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그 말을 뒤로 하고 까미유는 싱긋 웃더니 인사할 새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태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본 채 그가 떠난 자취를 좇았다.

“……자유를 억압한다면.”

'WRITINGS > 사이퍼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틀비루이] 온기  (0) 2019.07.23
[데샹테이] 雪泥鴻爪(설니홍조) 下  (0) 2019.04.16
포타공개 / [루드탄야] Habseligkeit  (0) 2018.10.08
[루드벨져] 썰 4~8  (0) 2018.10.02
[루드벨져] Biestern  (0) 2018.06.27